[김준혁의 역사와 현실] 정조의 수원 나무심기와 수원 수목원 설립
상태바
[김준혁의 역사와 현실] 정조의 수원 나무심기와 수원 수목원 설립
  • 김준혁 한신대 교수
  • 승인 2020.05.13 13:34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김준혁(한신대학교 교수.한국사 전공)

 

조선시대는 풍수적인 면과 함께 국가에서 필요로 하는 나무를 공급받기 위하여 조정에서 서울 주변의 사산(四山)과 왕릉 또는 특별히 지정한 곳에서 나무하는 것을 법으로 금지하였다. 사산이란 북쪽의 북악, 남쪽의 목멱산, 서쪽의 인왕산, 동쪽의 낙산을 말함이었다.
현종대에는 형조에서 8개 조항의 금제조(禁制條)를, 한성부에서 6개 조항의 금제조를 만들었는데 그 중 하나가 사산에서 소나무를 베지 못하게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와 같은 법령에도 불구하고 일반인들이 죽은 소나무를 베어가자 한성부로 하여금 순찰케 하여 좋은 재목이면 영선(營繕)에 사용하고, 재목이 못 되는 것이면 기와 가마에 쓰게 하였다.
한편 산에서 나무를 베고 불을 질러 밭을 만드는 백성들 때문에 물의 근원이 모두 끊어져 산에 나무가 무성하지 못하였다. 이에 산에다 불 놓는 자를 죄로 다스리게 하였다.
소나무 등 각종 나무가 손상되는 것은 벌채로 인한 것도 있지만 송충이에 의한 피해도 많았다. 중종대에 서울 근처 10리 사이의 소나무와 능침의 소나무를 송충이가 모두 갉아 먹는 사건이 발생하자 한성부에서 송충이를 잡게 하였으나 너무 많아 모두 잡을 수가 없었다고 한다. 특히 동대문 밖과 동소문 밖, 성균관 주산(主山)과 건원릉(健元陵) 근처에 송충이가 많았는데 사람들은 이것을 재앙이라고 하였다. 송충이의 피해가 극심하자 영조대에는 사산의 소나무를 갉아 먹는 송충이를 부민(部民)들로 하여금 날마다 3승(升)씩 잡아 바치도록 하였다. 이에 백성들은 공역이 심하자 파묻은 것을 파서 다시 바치는 등 폐단도 있었다.
백성들은 왕릉의 나무도 베어갔다, 왕릉의 나무 가운데 10그루 이상을 베면 사형에 처하는 법을 만들었으나 백성들은 무서워하면서도 왕릉의 나무를 몰래 베기도 했다. 정말 충격적인 것은 세종대왕의 능인 영릉도 봉분 뒤쪽의 숲의 나무를 모두 베어가 민둥산이 되었다. 세종의 왕릉까지 베어 갈 정도였으니 정말 나무가 귀하긴 귀한 시대였다. 그래서 조정은 금산정책 혹은 금송정책을 만들어 시행하였으나 성공하지 못했다.
효종대에 온돌이 보급되고 나서부터 더욱 나무가 귀해졌다. 부엌의 아궁이에서 때는 불로 인하여 밥짓기와 따스한 방을 만들 수 있는 온돌은 주저문화에는 매우 좋은 발명이었지만 산림을 파괴하는데 결적적 계기가 되었다. 이후 온 나라가 벌거숭이 산이 되어갔다.
숙종대에 소나무를 베지 못하게 하는 금송정책(禁松政策)을 실시하였지만 그 효과는 그리 크지 않았다. 조정이 나무의 중요성을 인식하였지만 온돌의 맛에 익숙한 백성들이 나무 베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그래서 한 여름 장마가 오면 고을 인근의 산하에 나무가 없어 큰 물난리를 만나 백성들의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정조는 금송정책의 한계를 뛰어넘어 식목정책을 추진하기로 하였다. 나무를 베지 못하게 하는 것보다 나무를 많이 심어 산림을 푸르게 하는 것이 더 좋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게 바로 시대를 읽고 시대의 변화에 따라 정책을 만드는 것이다.
정조는 먼저 자신의 아버지 사도세자의 사당인 경모궁(景慕宮) 일대에 나무를 심기 시작했다. 경모궁은 오늘날 혜화동에 있는 서울대학교 병원 일대다. 창경궁에서 나오면 바로 있는 곳으로 나지막한 언덕이 있었다.
정조가 처음 경모궁을 조성할 때 사방 주위 산에 나무가 매우 듬성듬성하였다. 그래서 정조는 관리들에게 매년 봄가을로 소나무, 삼나무, 단풍나무, 녹나무, 매화나무, 살구나무, 복숭아나무, 버드나무 등을 캐어다 심게 하였다. 그 결과 몇 년 안 되어 숲이 울창하게 조성되어 사당의 면모가 더욱 엄숙하게 되었다.
경모궁을 중심으로 나무를 심은 정조는 자신이 만든 시범도시 수원을 중심으로 나무를 심었다. 1789년 7월 아버지 사도세자의 묘소를 양주 배봉산에서 수원도호부 화산으로 이전하고 신읍치를 팔달산 자락에 새로 조성하였다.
정조는 첫 번째로 아버지의 묘소인 현륭원 일대에 본격적인 나무 심기를 하였다. 더불어 팔달산 자락에 만든 화성행궁 후원과 팔달산에도 많은 나무를 심었다. 소나무, 뽕나무, 잣나무 등 목재로 사용될 수 있는 나무와 유실수를 적극적으로 심었다. 특히 뽕나무는 양잠의 효과와 더불어  군사용 활의 주 재료이기도 했기에 더 많이 심었다. 탄력성이 강한 뽕나무는 대나무와 함께 활의 주재료였다.
정조는 자신의 친위도시이자 혁신도시로 조성한 수원에 우선으로 나무를 심고 수원 인근의 7개인 광주(廣州)ㆍ용인ㆍ과천ㆍ진위ㆍ시흥ㆍ안산ㆍ남양 고을에 나무 심기를 시작하였다. 관료들과 시전상인 등 경제적으로 여유있는 사람들로부터 묘목을 기증받았다.  
1789년 7월부터 심기 시작한 나무는 1795년까지 지속적으로 이어졌다. 정조는 1795년 윤 2월에 화성행궁에서 어머니 혜경궁 홍씨 회갑 잔치를 거행하고 그 관련된 내용을 차분히 기록하게 하였다.
이때 정조의 지시로 정약용이 식목 연표를 만들었다. 나무의 숫자는 놀랄 정도로 많은 숫자였다. 소나무ㆍ회화나무ㆍ상수리나무 등 여러 가지 나무를 모두 1200만9712그루나 심었다. 오늘날도 감히 상상할 수 없는 1000만 그루 이상을 심은 것이다. 이로써 수원과 주변 고을은 온통 나무가 가득했고, 풍요의 기반이 조성되었다.
정조는 나무를 심는 것은 백년 미래를 위한 것이 아니라 만년을 내다보는 계획이라고 하였다. 정말 길게 내다보는 안목이었다. 수원을 통해 조선은 나무심기가 본격화 되었다. 그리고 다시 조선은 푸른 숲으로 변해갔다.
최근 수원시가 일월저수지 일대에 시립 수목원을 만들기로 결정하고 열심히 준비중이다. 수원시가 수목원을 만드는 것은 어쩌면 정조의 식목정책을 계승하는 것이다. 수목원을 만들면서 정조가 심었던 역사적 나무를 모아 정조의 숲을 구성하고, 다산 정약용의 정원에 심은 나무와 모습을 그대로 조성하는 다산의 정원도 만들었으면 한다. 단순히 나무와 식물을 보전하고 연구하는 차원을 넘어 역사와 함께 하는 세계적인 수목원이 되기를 희망한다.